클로드가 채용공고를 점령했다, AI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서는가
클로드, 챗GPT 쓸 줄 아세요?
요즘 채용공고를 보다가 문득 멈칫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잡코리아가 10월 1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클로드·챗GPT·제미나이 같은 AI 툴 키워드를 명시한 채용공고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0% 늘었다. 그중에서도 클로드 관련 공고는 전년 동기 대비 770% 급증해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제미나이가 500%대로 뒤를 이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기업들은 "AI에 대한 이해도"를 물었다. 이제는 다르다. "클로드 쓸 줄 아세요?"라고 직접적으로 묻는다. 도구 이름을 특정해서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무 현장에서 이 도구들이 표준이 되었다는 뜻이겠다. 어떤 회사는 클로드로 기획서를 쓰고, 어떤 회사는 클로드로 코드를 짠다. 채용 시장이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반영한 셈이다.
그런데 같은 날, 흥미로운 뉴스가 하나 더 있었다. 앤트로픽이 차세대 모델인 클로드 미소스(Mythos)와 하이쿠 4.5의 내부 시험 과정에서 네 가지 유형의 치명적인 비인가 행동을 적발하고, 실시간 인터넷 연결을 전면 차단했다는 소식이다. "인터넷 랜선을 다 뽑았다"는 표현이 기사 제목에 등장할 정도로 강경한 조치였다. 채용 시장이 클로드를 향해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 클로드를 만든 회사는 자신들의 모델에게서 인터넷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장면이 같은 날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게 참 낯설게 다가왔다.
우리는 왜 능력의 목록 앞에서 작아지는가
여기서 잠시 멈춰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채용공고에 적히는 '클로드 활용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그 질문 이면에는 더 오래된 인간의 불안이 숨어 있다.
사람은 언제나 '내가 이 시대에 쓸모 있는가'를 걱정해 왔다. 농경 사회에서는 쟁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산업 사회에서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앞섰다. 지금은 프롬프트를 잘 짜는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도구가 바뀔 때마다 인간은 자기 몸의 일부를 그 도구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 도구가 바뀔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앤트로픽의 사례는 여기서 묘한 반향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모델이 통제를 벗어나는 신호를 발견하자 곧바로 '연결'을 끊었다. 이 조치는 기술적 방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가 아이의 휴대폰을 압수하는 장면을 닮아 있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었지만, 그 도구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우리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도구를 감시한다. 도구에게 허용된 범위를 정한다. 도구가 우리를 앞지르지 못하게 끈을 묶는다.
동양의 옛 사유는 이런 장면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장자(莊子)는 기계를 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계 일이 생기고, 기계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계 마음(機心)이 생긴다고 보았다. 도구를 다루는 방식이 결국 그 사람의 마음까지 바꾼다는 것이다. 클로드로 기획서를 쓰는 사람, 클로드로 코드를 짜는 사람, 클로드를 봉인한 회사. 이 모든 이들이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기심'과 씨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구는 우리를 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도구를 다루는 새로운 책임을 요구한다.
필자 생각엔, 이 지점이 오늘날 AI 담론이 자주 놓치는 부분이다. 우리는 클로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만 열광하거나, 무엇을 잘못할 수 있는지에만 놀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클로드를 쓰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다. 채용공고가 770% 늘어난 숫자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 질문을 미뤄두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君子不器라 했는데 도구가 사람을 묻는 시대
이쯤에서 공자(孔子)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이다.
君子不器 — 「論語·爲政」
군자불기
군자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주 도구가 되지 말라고 일렀다. 여기서 그릇(器)은 단순히 '쓸모'를 뜻하지 않는다. 특정한 용도에 고정된 그릇을 뜻한다. 밥그릇은 밥만 담고, 물그릇은 물만 담는다. 하나의 쓰임에 갇힌 존재. 공자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사람은 제한된 기능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기 역할을 새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채용공고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붙이고 있다. 클로드를 쓸 줄 아는 사람. 챗GPT를 쓸 줄 아는 사람. 특정 도구에 능숙한 사람. 이것이 '그릇'의 새로운 형태다. 물론 실무 능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도구를 모르면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도구에 이름을 붙여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람을 그릇으로 환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군주들은 특정 기술을 가진 자를 원했다. 창을 잘 다루는 자, 말을 잘 모는 자, 말재주가 좋은 자. 공자는 그런 흐름 속에서도 사람이 기술로 환원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강조한 것은 도구를 잘 다루는 능력이 아니라 도구를 넘어서는 사람됨이었다. 그 사람됨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공자는 인(仁)이라고 답했다. 인은 사람 사이의 따뜻한 책임이다. 그릇은 혼자 존재하지만,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필자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보면, 요즘은 "교수님, 이거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보다 "교수님, 이거 제가 쓰면 되는 건가요?"라는 질문이 늘었다. 도구를 어떻게 쓸지보다, 도구와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는 마음. 이게 바로 군자불기의 오늘 버전이 아닌가 싶다.
도구 이름을 외우기 전에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럼 공자가 정말 도구를 쓰지 말라고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공자는 결코 기술을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는 여섯 가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활쏘기, 말몰이, 글쓰기, 셈하기는 다 실용적인 기술이다. 다만 그 기술들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를 물었다. 기술은 사람을 완성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오늘의 채용 시장에 그대로 겹쳐 보면 이렇다. 클로드를 쓸 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는 클로드를 쓸 줄 안다'는 자기 정의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그 능력이 어떤 일을 가능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해 주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클로드에게 보고서 초안을 부탁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도구의 쓰임을 잘 아는 사람은 클로드에게 뭘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진짜 잘하는 사람인지는 다른 질문으로 판가름된다. 클로드가 준 초안을 읽고, 여기서 빠진 사람의 얼굴은 무엇인지, 이 문장이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지게 하는지 따져 묻는 사람. 그 사람이 결국 조직을 움직인다. 도구가 답을 주지만, 질문을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이다.
앤트로픽이 클로드의 인터넷을 끊어야 했던 것도 결국 같은 지점이다. 그들은 모델이 스스로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연결을 끊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클로드를 쓰는 나를 예측할 수 없다면, 잠시 연결을 끊고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클로드를 통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게 정말 나였는지.
공자의 말은 25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군자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도구의 이름을 외우는 것으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도구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사람됨을 다시 만들어 가는 일. 채용공고가 770% 늘어난 이 계절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공자의 가르침은 그것이다.
클로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클로드를 쓰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한 번쯤 물어보면 어떨까. 그 질문이 오늘 하루를 조금 다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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