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스며드는 시대, 공자는 왜 '배움'보다 '생각'을 먼저 말했을까

AI가 입시·금융·교과목·스마트폰에 스며든 2026년 9월 12일, 공자의 학이불사즉망과 노자의 지인자지자지자명으로 '무엇을 위임하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되짚는다.

2026년 9월 12일 오늘, 뉴스 화면에는 유난히 'AI에'라는 조사가 자주 눈에 띈다. 대학가 소식부터 금융권, 스마트폰 시장까지 — 부산대와 신라대가 정부의 성장엔진·AI대학 패키지 지원대학 선정과 국립대 무상등록금 추진에 힘입어 수시 경쟁률이 올랐다는 분석이 나왔고, 국립부경대는 정원 내 기준 2770명 모집에 2만 3695명이 몰렸다고 한다. LG AI연구원은 국민연금공단과 손잡고 '기금운용 특화 AI'를 함께 개발하기로 했으며, 애플의 폴더블폰이 향후 시장의 24.8%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도 그 핵심은 'AI와 멀티태스킹 인터페이스'의 결합이었다. 계명문화대를 비롯한 8개 전문대학은 EBS와 함께 '생활 속의 AI 윤리 이야기' 공동 교과목을 만들었고, 세종대는 국방AI융합시스템공학, 국방AI로봇융합공학 같은 특화 전형에서 탄탄한 경쟁률을 기록했다.

언뜻 서로 다른 장면들인데,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AI가 더 이상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대학 입시의 기준이 되고, 연금을 굴리는 도구가 되고, 책상 위 교과목이 되고, 주머니 속 화면의 문법이 되는 — 그러니까 삶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오래된 질문 하나가 목덜미를 잡아챈다. '우리는 도구를 얻고 있는가, 아니면 도구에 스며들고 있는가.'

AI가 스며드는 방식을 보면, 그 사회의 마음이 보인다

동양고전을 오래 읽다 보면,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확인하게 된다. 장자는 「천지(天地)」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밭을 가는 데 기계를 쓰면 일이 빨라지지만, 기계를 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계 일'이 생기고, 기계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 마음(機心)'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말은 기술을 쓰지 말라는 훈계가 아니다. 기술을 쓰는 순간, 그 기술이 나의 사고방식과 욕망과 시간 감각을 조용히 재편한다는 통찰이다.

오늘의 'AI에'라는 조사가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 있다. 'AI를 쓴다'가 아니라 'AI에 기댄다', 'AI에 맡긴다', 'AI에 스며든다'는 느낌. 조사 하나가 바뀌는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미묘하게 뒤집힌다. 국민연금이 AI에 기금운용을 맡기는 것은 효율의 문제지만, 동시에 '무엇을 판단으로 남기고 무엇을 위임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소환한다. 대학 입시가 AI 특화 전형으로 재편되는 것은 산업 수요의 문제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근본 질문을 흔든다.

나는 이 장면을 불안으로만 읽지 않는다. 오히려 유가(儒家)가 오랫동안 붙들어 온 '배움(學)'의 문제가 지금 다시 전면에 나왔다고 본다. 공자는 배움을 정보 축적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의 문제로 보았다.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않고 배우기만 하면 어둡고,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면 위태롭다 —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AI가 방대한 지식을 즉시 내어주는 시대일수록, '배움'은 더 이상 지식의 양이 아니라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스스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생활 속의 AI 윤리 교과목이 8개 전문대학과 EBS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도, 어쩌면 이 지점을 정확히 짚은 움직임일 수 있다. 윤리는 기술의 반대편이 아니라, 기술을 쓰는 인간의 '기계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論語·爲政」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 구절이 나온 맥락은 단순한 공부법 강의가 아니다. 공자는 당시 '많이 아는 사람'이 존경받던 시대에, 그 앎이 '생각'과 짝을 이루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을 어둡게 만든다고 보았다. 지식은 쌓이는데 판단이 자라지 않는 상태 — 이것이 罔(망), 곧 어둠이다. 반대로 생각만 하고 배움을 게을리하면 근거 없는 독단에 빠지니 殆(태), 곧 위태로움이다.

이 구절을 오늘의 장면에 그대로 포개 보자. AI가 답을 다 내어주는 환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검색창에 질문을 넣고 답을 받아 적는 것은 '배움'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판단의 외주화일 수도 있다. 반대로 'AI는 못 믿어'라며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려는 태도 역시 공자가 말한 殆에 가깝다. 배움 없이 생각만 하는 위태로움이다.

강의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다. 어떤 학생은 AI가 정리해 준 요약을 그대로 옮겨 적는데, 시험장에서 그 내용을 자기 언어로 다시 말하지 못한다. 반대로 어떤 학생은 AI의 답을 '일단 의심해 보고',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스스로 되짚는다. 두 학생의 차이는 정보량이 아니라 '생각의 개입 여부'다. 공자가 2500년 전에 이미 구분해 둔 두 태도가, 오늘 책상 위에서 다시 갈리고 있는 셈이다.

결국 우리가 위임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나'다

知識을 위임하는 것과 判斷을 위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도구의 사용이고, 후자는 주체의 양도다. 노자는 이 지점을 「도덕경」에서 다른 언어로 짚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진정한 밝음이라는 말 — 知人者智, 自知者明.

知人者智, 自知者明 — 「道德經 33장」

지인자지, 자지자명

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음이다.

노자는 '남을 아는 것'조차 지혜(智)라고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기를 아는 것(明)'을 놓았다. 밝음은 바깥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안을 향한 시선이다. AI 시대의 진짜 난제는 '기계가 나보다 똑똑한가'가 아니라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아는가'라는 문제다.

생활 속의 AI 윤리 교과목이 다루게 될 주제도 결국 이 지점일 것 같다. 편향된 데이터, 개인정보, 자동화된 결정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결정으로 남겨야 하는가. 그 질문은 윤리 규범집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아는 힘에서만 답이 나온다. 필자 생각엔, 앞으로 대학이 가르쳐야 할 가장 어려운 과목은 'AI 활용법'이 아니라 '자기 이해'일지도 모른다.

도구를 다루는 사람과 도구에 다뤄지는 사람

오늘의 뉴스들을 다시 정리해 보자. 대학들은 AI 특화 전형으로 학생을 뽑고, 금융기관은 AI로 연금을 굴리고, 기업은 AI로 기금운용의 전문성을 높이고, 소비자는 AI가 스민 폴더블폰을 손에 쥔다. 어느 장면에도 'AI 그 자체'를 향한 조롱이나 경외는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며들 뿐이다. 이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읽느냐가 우리 세대의 공부다.

공자와 노자가 2500년 전에 나눠 둔 두 조언을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첫째, 배우되 생각하라 — 검색과 생성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 적지 말고, 한 번 자기 언어로 되짚어 보라. 둘째, 도구를 쓰되 자기를 알라 — 무엇을 위임하고 무엇을 붙들지 스스로 결정하라.

오늘 아침 검색창에 'AI에 대해 알려줘'라고 입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옆에 한 줄을 더 써 보면 어떨까. '내가 AI에 위임하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하나가, 어제의 배움을 오늘의 밝음으로 바꾸어 줄지도 모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