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네 면이 휘어진다는데, 우리 마음은 어디까지 펴졌을까

2026년 9월 24일, 20주년 아이폰의 '네 면이 휘어진' 무베젤 디자인 소식과 D램·낸드 가격 흐름, 추석 연휴 스마트폰 자제 권고까지. 오늘의 스마트폰 뉴스를 노자 「도덕경」 22장의 '곡즉전'으로 다시 읽어본다. 휘

스마트폰에 남은 테두리를 지우는 시대

2026년 9월 24일, 오늘 아침 뉴스에 눈이 멈췄다. 20주년 아이폰이 화면 네 면까지 휘어진다는 소식이다. 좌우 측면만 둥글게 말던 커브드 디스플레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하·좌·우 네 방향에서 OLED 패널을 휘어 테두리를 거의 지워버리는 '무베젤' 디자인이라 했다. 확정된 것은 아니고, 업계 관측이라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같은 날 다른 기사도 나란히 놓여 있었다. D램과 낸드플래시의 가격 흐름이 갈렸다는 소식이다. AI 서버용 HBM 생산이 우선되면서 PC·스마트폰용 범용 D램의 생산 여력이 줄고, 그 결과 스마트폰용 D램도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낸드는 흐름이 다르다고 하니, 같은 기계 안에 들어가는 부품인데도 사정이 엇갈린 셈이다.

퀄컴은 "PC 호환성 논란은 끝났다"며 7300개 앱을 품은 '분산 AI' 청사진을 꺼내 들었고, 메타는 뮤즈 전용 기기를 12월에 출시하겠다며 스트랩 없는 두꺼운 스마트워치 형태의 화면을 공개했다. 저커버그는 스마트폰을 잠금 해제하거나 앱을 열지 않고도 뮤즈 참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수시 원서를 낸 수험생들에게는 추석 연휴에 장시간 스마트폰을 붙들지 말라는 조언까지 흘러나왔다.

한쪽에서는 스마트폰의 테두리를 지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마트폰을 아예 손에 쥐지 말라고 한다. 같은 날의 뉴스인데 방향이 정반대다. 나는 이 장면이 낯설게 다가왔다.

없애는 기술과 붙드는 마음

생각해보면 근래의 기술은 '경계를 지우는' 쪽으로 달려왔다. 화면 테두리, 기기와 기기의 경계, 클라우드와 단말의 경계, 심지어 몸과 기기의 경계까지. 퀄컴이 말한 '분산 AI'도 결국 클라우드의 지능을 스마트폰·차량·로봇으로 끌어내려 경계를 흐리는 발상이다. 메타가 말한 '잠금 해제 없이 쓰는 기기'도 마찬가지다. 켜고 끄는 의식 자체를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계를 지우는 기술이 늘수록, 우리는 경계를 세우라는 권고를 더 자주 듣는다. 연휴에 스마트폰을 오래 보지 말라, 기상 시간을 늦추지 말라, 밀린 영상을 몰아보지 말라. 기기가 나를 붙들지 않게 하려면, 내가 나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장자는 「산목(山木)」 편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군자가 벗을 사귐에 있어 그 사이를 끊지도 않고 지나치게 붙지도 않는다는 뜻의 구절이다. 나는 이 대목을 오래 곱씹어 왔다. 끊는 것도 어렵지만, 지나치게 붙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오늘의 스마트폰은 정확히 그 '지나친 붙음'의 문제를 우리 앞에 놓는다.

기술이 테두리를 지우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화면이 네 면으로 휘어 경계가 사라지면, 세상이 내 손 안에 매끄럽게 이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리 매끄러워도 그 안에 담기는 정보는 유한하고,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내 몸도 유한하다. 테두리는 지울 수 있어도, 내가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양은 늘지 않는다.

曲則全, 휘어진 것은 온전함에 닿는가

曲則全, 枉則直 — 「道德經 22장」

곡즉전, 왕즉직

휘어진 것은 온전해지고, 굽은 것은 곧아진다.

노자가 「도덕경」 22장에서 남긴 이 말은 오늘의 '네 면이 휘어진 화면'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기술의 언어로 읽으면, 휘어야 화면이 온전해진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그렇다. 평평한 유리로는 네 모서리를 감쌀 수 없으니, 휘어야 테두리가 지워지고 화면이 '완전한' 형태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노자가 이 말을 한 맥락은 결코 디스플레이 공정이 아니다. 그는 낮춤과 물러섬, 자기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온전해지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남보다 앞서려 애쓰지 않고,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것. 그렇게 자기 안의 곧음을 지키는 사람이 결국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고. 휘어진 화면이 아름다운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 곧 테두리가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 그 아름다움의 본질이다. 좋은 기기일수록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좋은 사람일수록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다. 노자가 보았다면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화면은 자기 경계가 보이지 않는 화면이라고.

휘어진 화면과 펴지지 않는 마음

「도덕경」 22장의 원문, 곡즉전(曲則全)의 曲(곡)은 단순히 굽었다는 뜻만이 아니다. '굽힐 줄 안다'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곧음을 지키기 위해 잠시 굽힐 줄 아는 태도다. 이 한자를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풀어줄 때 나는 늘 이런 예시를 든다. 앙보(仰保)를 세우려다 오히려 부러지는 사람보다, 한 번쯤 물러서서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자기 뜻을 이루더라는 이야기다.

이 관점을 오늘의 스마트폰에 겹쳐 보자. 새 화면은 네 방향에서 휘어 테두리를 지운다. 테두리가 없는 화면은 한층 더 몰입을 부른다. 몰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몰입할수록 경계가 사라지고, 경계가 사라질수록 사용자는 자기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감각하지 못한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하던 것을 기억한다. "교수님, 저 어제 유튜브를 여섯 시간 봤는데 본 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기술이 지우는 '테두리'가 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리듬의 경계였음을 느꼈다. 아침과 저녁의 구분, 일과 쉼의 구분,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의 구분. 그 구분이 흐려질 때 사람은 편안함과 매몰됨을 자주 혼동한다.

D램과 낸드의 가격 흐름이 갈렸다는 오늘의 뉴스도, 같은 기계 안에서조차 부품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하나의 완성품은 여러 부품이 각자 제 몫을 지킬 때 완성된다. 화면이 아무리 매끄러워도 그 안쪽에는 저마다의 경계와 한계를 가진 부품들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스마트폰 하나에 하루 종일 매달리도록 설계된 세상에서, 우리는 각자 제 몫의 리듬을 지켜야 한다.

곡즉전이 오늘의 사용자에게 건네는 말

곡즉전(曲則全)은 결국 이렇게 읽힌다. 스스로를 조금 굽힐 줄 아는 사람이 온전해진다. 오늘의 사용자에게 이 말은 두 갈래로 번진다. 하나는 기기와의 관계에서 오는 굽힘이다. 하루 몇 시간 스마트폰을 붙들지 않겠다고 스스로 굽힐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자기 시간을 온전히 되찾는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굽힘이다. 눈앞의 화면이 아니라 옆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잠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자기 관계를 지킨다.

수험생에게 추석 연휴에 스마트폰을 붙들지 말라고 조언하는 기사도 같은 결이다. 이 조언은 금욕이 아니다. 흐름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줄여 스스로의 리듬을 지키라는, 아주 노자적인 조언이다.

기술이 화면을 휘는 것과 내가 마음을 펴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화면은 어디까지든 이어질 수 있지만, 사람의 하루는 하루만큼이다. 그 유한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기기를 도구로 부리지, 기기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이 차이를 감각하는 것이 오늘 배울 몫이다. 어쩌면 20주년 아이폰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네 면이 모두 이어진 그 화면 앞에서, 내 마음의 네 모서리는 어디쯤인가.

한 사람의 하루가 곧 하나의 온전함이다

휘어야 온전해진다는 오래된 문장은 기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도 하루를 살아가며 자기 테두리를 조금씩 굽혀야 한다. 굽힘은 약함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위한 여유다. 오늘 스마트폰이 새 화면을 예고한 하루, 우리는 어느 쪽으로 조금 굽혀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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