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로봇·AI 질주, 장자가 본 '쓸모없음'의 지혜

삼성전자는 오늘도 달린다, 그런데 그 속도 앞에서 잠시 멈춰 보면
2026년 9월 6일, 뉴스 피드를 열면 삼성전자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반도체 생산능력은 2027년까지 완판됐고, 최고경영자 직속 미래로봇추진단을 신설했으며, 로봇용 배터리 시장을 노리는 에코프로의 움직임도 삼성전자와 연결됩니다. 중국과 일본 업체들이 낸드플래시 저가 시장을 파고들자, 삼성전자는 HBM과 첨단 D램에 집중하며 AI 시대의 고부가가치 영역을 지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쁘게, 그리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며 저는 한 가지가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앞서서'를 외치는 걸까요. AI 반도체 시장을 선점해야 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열어야 하고, 글로벌 기술 패권을 잡아야 한다는 말. 그 모든 게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 당연함 속에서 가끔은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질문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삼성전자의 전략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경쟁의 풍경을 보면, 동양 고전의 오래된 질문—우리는 참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천 리를 달리는 기업과 '놀 줄 아는 삶'의 거리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새 붕(鵬)이 나옵니다. 붕새는 날개를 펼치면 하늘을 덮고, 한 번에 9만 리를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새와 메추라기는 그런 붕새를 보고 비웃습니다. "우리는 느릅나무 사이를 날아다닐 뿐인데, 왜 저렇게 멀리 나는 걸까?" 하고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붕새의 웅대함을 찬양하지만, 장자의 의도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장자는 작은 새와 큰 새의 삶을 비교하며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 제 분수를 알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작은 새가 천 리를 날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붕새가 참새처럼 나무 사이만 날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붕새의 속도에 강제로 올라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AI 반도체 전략, 로봇 사업 진출은 분명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못 따라가면 도태된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HBM 시장에서 뒤처지면 미래가 없다, 로봇 시장을 선점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없다. 기업도 인간도 이 공포 속에서 쉼 없이 달립니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불안한 존재였을까요? 장자는 우리가 이렇게 얽매인 삶을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라는 말처럼, 모든 게 쓸모로 환원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정말 가치 있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人皆知有用之用,而莫知無用之用也 — 「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
인개지유용지용, 이막지무용지용야 - 사람들은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쓸모는 알지만,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장자는 조정(궁궐 뜰)에 심긴 나무를 이야기합니다. 목수가 그 나무를 보고 "이 나무는 배를 만들 수도, 관을 만들 수도, 다리를 만들 수도 없구나"라며 지나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쓸모없는 나무가 수백 년을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웁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일찍 꺾이고, 좋은 재목은 먼저 베입니다. 하지만 아무 데도 쓸모없는 나무는 천수를 누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나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기업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고, 개인은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평가됩니다. 그러니 쓸모없는 것, 곧 느긋한 시간, 멍 때림, 관계, 쉼, 그리고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살아있음 그 자체가 점점 사라져 갑니다. 삼성전자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기업도, 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도, 그 상품을 소비하는 우리도 모두 쓸모의 강박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요.
제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봅니다. 학생들은 전공 공부에, 취업 준비에, 인턴십에 쉼 없이 달립니다. 그때 저는 가끔 이렇게 묻곤 합니다. "너희가 가장 쓸모없는 것을 하나씩만 지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너희 인생의 지킴이다"라고.
길이 없는 길 위에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지혜
장자의 '무용지용'은 태만이나 안주를 권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품은 '쓸모'라는 잣대가 얼마나 좁은지, 그 좁은 잣대로만 살아가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놓치는지를 깨우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시장에서 기술을 키우고, 로봇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당연한 생존 전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도 사람의 모임입니다.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붕새처럼 9만 리를 나는 강박에 시달리면, 기술 발전보다 먼저 인간이 지칠 것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吾喪我 —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오상아 - 나는 나를 잃었다.
잠깐, '나를 잃었다'면 불행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장자에게 이 말은 오히려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붙들고 있는 것—욕심, 비교, 불안, 성취 강박—그것을 내려놓고 본래 모습과 만나는 것. 스마트폰을 한 번도 놓지 못하는 우리가, 한 해 동안 해야 할 일을 계획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잠시 그 모든 것에서 내려놓을 때 도리어 진짜 나와 마주한다는 뜻입니다.
고요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삼성전자나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에서 원하는 것은 단지 기술과 제품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 세계를 선점하는 기쁨. 그러나 그 세계는 반드시 누군가의 어깨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반도체 클린룸에서, 로봇 연구실에서, 회의실에서.
그 사람들도 아마 가끔은 쓸모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입니다. 주말 낮잠, 느긋한 차 한 잔, 혹은 아무 목적 없는 산책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쓸모없음'이라고 부르는 세상은 어쩐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늘을 드리우는 기술, 멈출 줄 아는 힘
우리는 지금까지 장자의 '쓸모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해서, 무조건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장자가 말하는 것은 '능동적 쓸모없음'입니다. 목적이 없어서 놀지 말고, 목적을 내려놓고 오히려 충만해지는 것.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의 하루를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심장이 뛰고, 커피를 마시고, 회사에 가고, 일을 하고, 잠을 잡니다. 이 가운데 그 어디에도 목적이 없는 순간이 있나요? 아마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심장은 뛰는데 왜 뛰는지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 커피를 마실 때 왜 마시는지 계획하지 않고 향을 맡는 순간, 그것이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입니다.
삼성전자라는 기업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반도체 회로를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로는 인공지능의 두뇌가 되어 사람들의 삶을 바꿀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술의 완성도가 단지 속도와 밀도로만 측정된다면, 그리고 그 기술과 경쟁의 피로 속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온 것일까요.
장자의 나무는 쓸모없어서 오래 살았습니다. 기술은 쓸모가 있어서 발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을 모두 살릴 수는 없을까요. 최고의 기술을 만들기 위해 달리면서도, 그 옆에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를 지킬 수는 없을까요. 그것이 기업의 문화일 수도, 한 개인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삼성전자 뉴스를 보면서 한 가지를 곱씹습니다. 우리가 진짜 만들고 있는 것은 반도체와 로봇이 아니라, 내일의 삶일 텐데 말이죠. 내일의 삶이 오늘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길 바란다면, 우리는 속도뿐 아니라 방향을, 그리고 가끔은 멈춤을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빠른 기술 뒤에 지친 사람이 앉을 쉼터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쓸모를 만들어도 그 쓸모는 누구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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