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모든 것이 바뀌는 시대, 장자는 왜 기계를 경계했을까

2026년 9월 20일 'AI로' 모든 것이 재편되는 뉴스들을 장자 「천지」편의 기계심(機心)으로 읽는다. 도구를 쓰되 물음을 잃지 않는 경계에 대한 동양철학적 사유.

AI로 다시 쓰이는 오늘의 풍경

2026년 9월 20일, 하루 사이에 들려온 뉴스들을 나란히 놓고 보니 흥미로운 풍경이 그려진다. 구혁채 차관은 노벨상 수상자들과 만나 'AI 시대 연구혁신'을 논의했고, 참석자들은 AI가 과학적 발견의 방식과 연구자의 역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를 두고 경험과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같은 날 LG전자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과 총소유비용(TCO)을 낮춘다는 '공랭식 무급유 인버터 터보 칠러'를 선보이며 냉각 효율을 20% 높였다고 밝혔고, HP프린팅코리아는 우송대와 손잡고 AI 현장 실무형 인재 양성과 인턴십 연계에 나섰다. 여기에 1448명이 몰린 '수학적최적화 경연대회'에서 일본팀이 우승했다는 소식까지 — 수학적최적화는 주어진 자원과 조건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아내는 기술로, AI와 양자컴퓨팅, 로봇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반이라고 한다.

요즘 화제의 중심에는 늘 'AI로'라는 말이 놓여 있다. AI로 연구하고, AI로 냉각하고, AI로 가르치고, AI로 최적화한다. 그런데 이 장면들을 하루치 신문처럼 훑다 보니, 문득 한 구절이 떠올라 마음이 멈췄다. 장자가 기계를 두고 남긴 말이다. 왜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 아침 헤드라인 위로 겹쳐 보였을까.

도구가 편해질수록 마음 한켠이 서늘해지는 이유

장자는 「천지(天地)」편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 일이 있고, 기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 마음이 있다." 여기서 기계 마음(機心)은 단순히 '나쁜 마음'이 아니다. 계산하고, 따지고, 효율을 앞세우는 마음가짐 전체를 가리킨다. 도구를 쓰는 순간 그 도구의 논리가 나의 사고방식까지 스며든다는 통찰이다.

오늘의 뉴스를 이 렌즈로 다시 읽어보자.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연구자의 역할'이었다. AI가 발견의 방식을 바꾸면,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이건 단순한 기술 질문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누구인지'를 거의 같은 말로 써왔다. 그런데 AI로 잘하는 일이 재빨리 대체될 때, 사람은 자기 정체성의 바닥이 흔들리는 감각을 겪는다. 이것이 요즘 많은 이들이 AI 뉴스를 보며 느끼는 미묘한 불안의 정체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수학적최적화 경연대회에 1448명이 몰렸다는 사실도 곱씹어볼 만하다.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는 기술에 이만큼의 열기가 쏠린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정답 찾기'를 하나의 미덕으로 삼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원과 조건이 주어지면 최선의 답이 존재하고, 그것을 계산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도가의 눈으로 보면 이 믿음은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위험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자원과 조건의 함수로 환원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관계의 결,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 같은 것들은 어떤 목적함수에도 깔끔하게 담기지 않는다.

불교의 관점을 겹쳐보면 또 다른 층이 드러난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얽혀 생겨난다는 뜻이다. AI 데이터센터의 냉각 효율 20% 개선 같은 소식은 반가운 진보다. 다만 그것이 전력망과 물 사용량, 지역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까지 함께 보지 않으면, 개선은 다른 곳의 부담으로 옮겨갈 뿐일 수도 있다. 한 지점의 효율은 전체의 지혜와 다르다.

장자가 그은 선 하나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 「莊子·天地」

유기계자필유기사 유기사자필유기심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 일이 있고, 기계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 마음이 있다."

기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일

이 구절이 나오는 맥락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자는 이 이야기에서 도구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구를 씀으로써 생겨나는 '일'과, 그 일이 사람 안에 심어놓는 '마음'의 연쇄를 보라고 한다. 편리함 뒤에 따라오는 정신의 습관을 보라는 것이다.

기계심(機心)을 오늘의 언어로 풀면 이렇다. 모든 관계를 효율의 관점에서 계산하고, 모든 대화를 최적해 산출의 장으로 바꾸려는 태도다. 예컨대 생성형 AI로 답장을 대신 쓰는 일 자체는 편하다. 그러나 그 편함이 반복되면, 내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한 문장 한 문장 골라 쓰던 그 느린 시간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 느린 시간이 바로 관계를 사람답게 만드는 시간이었다는 걸, 우리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이것이 장자가 걱정한 마음의 습관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이 하나 있다. 장자가 기계를 쓰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AI를 두고 취할 태도는 '거부'도 '맹신'도 아니다. 도가의 무위(無爲)가 게으름이 아니듯, AI를 잘 쓰는 지혜도 '아무것도 안 하기'가 아니라 억지로 조작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은 내가 붙들 것인가를 스스로 정하는 일. 그 경계를 그리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인문학적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AI로 요약한 보고서를 내기 전에, 나는 그 내용을 내 말로 다시 한 번 설명할 수 있는가. AI로 최적화한 계획표를 짜기 전에, 그 계획이 나의 삶에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는가. LG전자의 터보 칠러가 냉각 효율을 20% 높였다는 소식을 접할 때, 나는 '얼마나 빨라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속도로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가'까지 묻고 있는가.

여기서 잠깐, 교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본다. 어느 학생이 "교수님, 이제 AI가 다 해주는데 우리가 고전을 왜 읽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AI는 답을 잘 만든다. 하지만 물음을 잘 만드는 것은 아직 사람의 몫이고, 좋은 물음은 좋은 글을 읽어본 사람만 만들 수 있다." 장자가 말한 기계심을 피하는 길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도구를 쓰되 도구가 나의 물음을 대신하게 두지 않는 것. 그 경계를 지키는 사람에게 AI는 좋은 도구가 되고, 그 경계를 놓친 사람에게 AI는 조용히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주인이 된다.

묻는 마음의 자리를 남겨두기

AI로 세상이 빨라질수록, 느리게 묻는 시간을 일부러 챙겨두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지혜일지 모른다.

오늘 당신이 AI에게 맡길 일 하나와, 끝까지 스스로 붙들 일 하나를 정해본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 하나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작은 경계선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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