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AI를 둘러싼 2026년의 풍경, 장자는 왜 無用의 쓸모를 말했을까
오픈AI라는 이름이 오늘도 뉴스 한복판에 서 있다
2026년 9월 30일. 오늘 아침 뉴스 화면을 넘기다 보니 '오픈AI'라는 이름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배경훈 부총리가 독파모 3차평가를 이어가겠다며 프론티어 AI 모델에 도전하겠다고 말한 자리에서도, 중국의 오픈웨이트 모델이 현장에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이 나왔다. 같은 날 앤트로픽의 IPO 문서에는 "AI가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담겼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앤트로픽은 2021년 오픈AI 출신 인력들이 세운 회사이고, 최고경영자 다리오 아모데이는 오픈AI의 방향과 지배구조를 둘러싼 의견 차이 끝에 회사를 나왔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오늘 '오픈AI'라는 키워드로 검색되는 기사 상당수가 정작 오픈AI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외소싱 판매자를 위한 AI 상세페이지 도구, 명절 선물로 잘 팔린 헬스케어 로봇, 프랑스 바게트 이야기까지. 오픈AI는 이제 하나의 회사 이름이라기보다, 우리 시대가 인공지능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떠올리는 하나의 좌표처럼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오늘따라 낯설게 다가왔다. 이름은 '열린(Open)'이라면서, 정작 그 이름을 둘러싼 담론은 경쟁과 경계, 경고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열린 것과 닫힌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
오픈AI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품었던 기대는 아마 '열림'이었다. 기술이 소수에게 갇히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으리라는 기대. 그런데 2026년의 풍경을 보면, 그 열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국면에 들어와 있다. 프론티어 모델이라는 말은 이제 '가장 앞선, 그래서 아무나 쉽게 손대기 어려운'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그 앞에서는 국가 단위의 평가와 도전이 오간다. 오픈AI 출신들이 세운 회사는 IPO 문서에 인류 위협 가능성을 적어 넣는다. 열림을 표방한 이름이, 어느새 인간이 자기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기술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중이다.
동양고전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보면, 이것은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도가는 오래전부터 '쓸모있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로 잘 쓰이는 것'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왔다. 유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신뢰를 근본으로 삼으면서, 도구는 그 관계를 받쳐주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장자는, 스스로 쓸모있다고 자처하는 것들이 오히려 사람을 옥죄는 경우를 유쾌하게 그려냈다.
나는 오늘의 오픈AI 담론을 보면서 두 가지 심리를 함께 본다. 하나는 '가장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앞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다. 이 둘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내가 손에 쥐지 못한 힘은 언제나 두렵고, 그래서 쥐고 싶어진다. 장자가 우화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변화 앞에서 사람이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그린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힘이 아니라, 그 힘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 쪽이라는 것.
장자는 왜 쓸모없는 나무를 칭찬했나
장자의 우화 중에 목수가 쓸모없다며 거들떠보지 않은 나무가 나중에 오히려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대목을 강의실에서 자주 소개한다. 학생들은 처음에 '쓸모없는 게 어떻게 좋은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취업과 스펙 경쟁에 밀려 정작 자기 삶을 잃어가는 이야기를 꺼내면 이내 표정이 진지해진다. 쓸모의 언어로만 자기를 재단할 때, 사람은 자기 안의 열린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오늘의 오픈AI 담론에도 이 목소리는 무겁게 겹쳐진다. 끊임없이 '더 앞서야 한다'는 요구, '무엇이든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 그 압박이 의미 있는 추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無用之用), 곧 쓸모없음의 쓸모는 게으름의 변명이 아니다. 자기가 정의한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태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을 남겨두는 여백의 윤리다. AI를 다루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 여백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만큼,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묻는 일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런즉 君子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君子有三畏 — 「論語·季氏」
군자유삼외
"군자에게는 세 가지 두려워하는 바가 있다."
공자는 여기서 세 가지를 든다.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말씀을 두려워한다고. 이 구절을 처음 만나면 오늘의 감각으로는 좀 낯설다. '두려워하다'라니,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가 말한 두려움은 겁이 아니라 경외(敬畏)에 가깝다. 자기 힘으로 다 어찌할 수 없는 큰 질서 앞에서 자세를 낮추는 태도, 그 태도가 사람을 함부로 날뛰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겁이 아니라 자세다
공자가 말한 세 가지 두려움 중 특히 천명(天命)은 오늘의 오픈AI 담론과 흥미롭게 포개진다. 천명은 하늘이 내린 명령이라기보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한계를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앞선 기술을 손에 넣어도, 그 기술이 어디까지 가닿을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결국 온전히 알 수 없다. 앤트로픽의 IPO 문서에 담긴 "AI가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어쩌면 이 천명이라는 감각을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적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기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두려움을 문서에 남기기로 선택했다.
여기서 君子有三畏의 가르침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다 control(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자기의 태도를 조율한다. 이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성숙이다. 예컨대 부모가 자녀의 모든 선택을 통제하려 할 때, 그 관계는 오히려 병든다. 자녀의 삶에는 부모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을 인정할 때 관계가 건강해진다. 오픈AI를 비롯한 AI 기술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본다. 무엇이든 통제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앞에서 겸허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배경훈 부총리가 오늘 '중국의 오픈웨이트 모델이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대목도, 나는 이 경외의 언어로 다시 읽는다.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겁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상황의 무게를 정직하게 인정한다는 뜻이다. 경쟁을 회피하자는 게 아니라, 경쟁의 판을 냉정하게 응시하자는 것. 공자가 강조한 그 자세와 결이 닿아 있다.
한자 畏(외)를 풀어보면 재미있다. 이 글자는 두려움과 공경을 동시에 품는다. 어떤 대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마음, 그래서 오히려 그 대상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마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畏는 아마 이쪽일 것이다. AI를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로 마주하는 것. 그 태도 위에서만 '열림'이라는 이름도 진짜 의미를 얻는다.
오늘 우리가 곱씹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픈AI라는 이름이 오늘 이렇게 많은 기사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름은 '열림'을 말하지만, 그 이름을 둘러싼 현실은 경쟁과 경계로 가득하다. 그 간극이 우리의 불안을 키운다. 그러나 동양고전은 이 간극을 겁으로 채우지 말고 경외로 채우라고 이른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서,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함께 묻는 태도.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 조각이다.
여백은 비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품고 있는 자리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