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자폭 카드’ 발언, 장자가 본 혐오의 정치

“혐오 장사꾼”이라는 칼날, 그 너머의 풍경

오늘(2026년 8월 31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는 단연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입니다. 안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이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을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것에 대해 “이재명 정부를 끝장낼 자폭 카드”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용 후보자를 향해 “‘혐오 장사꾼’”이라는 표현을 쓰며 지명 철회를 촉구했고, 심지어 “지지율 앞자리 2를 찍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 이상으로 읽힙니다. 상대방을 ‘혐오 장사꾼’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말을 건네는 사람 자신도 그 ‘혐오의 시장’에 뛰어든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왜 상대를 이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의 감정을 소환할까요. 그리고 그 감정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줄까요.

장자가 본 ‘혐오’라는 이름의 싸움

동양 고전은 오래전부터 이런 감정의 되먹임 구조를 경계했습니다. 장자(莊子)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是非)’의 싸움에 갇혀, 정작 자신이 그 싸움에 얼마나 깊이 빠져드는지 보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말한 ‘물론(物論)’의 세계, 즉 세상의 온갖 주장들은 결국 자기 입장을 세우기 위해 다른 입장을 깎아내리는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안 의원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읽힙니다. 그는 용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행보를 문제 삼으며 ‘혐오’라는 화두를 꺼냈지만,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상대방을 겨누는 칼날이 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칼날은 상대를 베는 동시에 칼을 쥔 손을 다치게 한다고. 정치적 반대를 넘어, 상대의 존재 자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녁은 언젠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大言不辨: 크게 말하는 자는 논쟁하지 않는다

大言不辨 — 「莊子·齊物論」

대언불변

“크게 말하는 사람은 변론하지 않는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대변불언(大辯不言), 대언불변(大言不辨)”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크게 말하는 사람은 말로써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말의 싸움이 결코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말이 많아질수록 진리는 더욱 멀어질 뿐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큰 말’이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통찰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를 꺾으려 하기보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고, 자신의 주장을 위해 상대를 ‘혐오’의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규정은 논리를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감정의 골만 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풀이와 가르침: 혐오의 시장에서 지켜야 할 것

장자의 가르침은 오늘의 정치 풍토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혐오 장사꾼’이라는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욕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 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혐오를 동원하는 정치가 결국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예언은, 혐오의 에너지가 어떻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아는 자의 경고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장면을 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동료를 헐뜯을 때, 인터넷에서 누군가를 ‘매국노’로 몰아세울 때, 심지어 가족끼리도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제할 때. 그 순간 우리는 상대를 길들이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혐오라는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도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고(知者不言, 言者不知). 진정한 지혜는 상대를 꺾는 데 있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정치적 공방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서로를 혐오의 이름으로 지목하는 세상, 아니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논쟁하는 세상. 장자는 후자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제물(齊物)’은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으로, 상대의 주장도 나름의 근거가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혐오의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아닐까요.

혐오는 상대를 향한 칼날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가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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