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물류자동화과 신설, 쿠팡 로봇이 강의실로 오는 날의 인간학

쿠팡 로봇이 강의실로 걸어 들어온다는 뉴스
2026년 9월 28일, 여러 매체에 같은 소식이 실렸다. 영남이공대학교가 쿠팡풀필먼트서비스와 손잡고 2027학년도에 AI물류자동화과를 신설한다는 내용이다. 모집 인원은 50명, 인공지능과 물류자동화, 설비보전, 스마트공장 기술을 융합한 2년제 실무 중심 학과라고 한다. 이재용 총장은 "쿠팡풀필먼트서비스와 연계한 현장 중심 학과로 운영해 학생들이 첨단 물류산업의 핵심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기사는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쿠팡 로봇이 강의실로."
나는 이 제목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로봇이 강의실로 온다는 말은, 강의실이 더 이상 사람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이 로봇의 문법을 배우러 모인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낯선 풍경이다. 물류센터에서 컨베이어 벨트와 로봇 팔이 상자를 나르던 시대를 지나, 이제 그 로봇을 가르치는 사람을 기르는 학교가 등장한 것이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물류센터의 자동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기계를 다루는 손과 그 손을 관리하는 눈이 필요해졌다. 단순 분류·포장 업무는 빠르게 기계로 넘어가고, 남는 자리는 기계를 돌보고 고치고 배치하는 사람의 몫이 된다. 문제는 그 '남는 자리'의 성격이다. 이것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기보다, 일자리의 생김새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이야기다.
기계를 배우는 사람, 기계를 닮아가는 사람
동양고전을 오래 읽어온 사람으로서 이 장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자(莊子)의 어느 대목이다. 장자는 기계를 쓰는 일과 그 기계에 물드는 마음을 한 몸처럼 보았다. 우물에서 두레박 대신 무거운 항아리를 쓰는 노인이 있었다는 우화, 기계를 쓰면 반드시 기계 일이 생기고, 기계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 같은 마음(機心)이 생긴다는 그 유명한 구절 말이다. (이 구절은 최근에 이미 여러 번 인용했으니 오늘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런데 오늘의 풍경은 그 우화와 결이 조금 다르다. 노인은 기계를 거부했다. 오늘의 학생들은 기계를 배우러 온다. 거부와 학습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거부는 기계 바깥에 서는 일이고, 학습은 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시야가 넓어지는 동시에, 기계의 논리가 나의 사고 회로에 스며든다. 나는 이것이 이 뉴스의 진짜 무게라고 본다. AI물류자동화과의 커리큘럼 그 자체보다, 이 학과가 길러낼 인간상(人間像)이 더 중요하다.
옛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순자(荀子)는 하늘과 땅과 만물을 다루는 일에서 사람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자주 물었다. 배우는 사람의 힘은 거짓 없는 축적에서 나온다고 그는 보았다. 지금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로봇을 다루는 기술은 쌓이면 쌓일수록 강해진다. 문제는 그 쌓임이 어디로 향하는가다. 상자를 더 빨리 나르는 방향인지, 혹은 사람이 사람으로 남는 방향인지.
내 강의실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인문학을 들으면서 "선생님, 저는 결국 코딩을 배워야 하나요"라고 묻는 친구들.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무엇을 배우든 상관없다고, 다만 무엇을 위해서 배우는지는 잊지 말라고. 오늘의 AI물류자동화과도 같은 질문 위에 서 있다.
도구를 배우는 일은 무엇을 지키는 일인가
여기서 주역(周易)의 한 구절을 꺼내고 싶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도구와 사람의 관계를 짧고 묵직하게 정리한 말이 나온다.
備物致用, 立成器以爲天下利 — 「周易·繫辭上」
비물치용, 입성기이위천하리
"만물을 갖추어 쓰임에 이르게 하고, 그릇(도구)을 세워 이룸으로써 천하의 이(利)가 되게 한다."
이 구절에서 눈여겨볼 말은 備物致用(비물치용)이다. 물건을 갖추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반드시 쓰임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 '쓰임'은 다시 天下之利(천하의 이)로 향해야 한다. 요컨대 도구는 사람을 편하게 하려고 존재하지만, 진짜 편함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주역은 도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집어 말하면, 도구를 제대로 쓰는 사람이 있어야 도구가 도구로 남는다고 말한다.
오늘의 물류 자동화를 이 구절에 겹쳐 보면 이렇게 된다. 로봇 팔과 AI 분류 시스템은 備物(비물)에 해당한다. 그것을 잘 굴리는 사람은 致用(치용)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 끝에 天下之利(천하의 이)가 있는가.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춰 서고 싶다. 우리는 너무 자주 '효율'을 천하의 이(利)로 착각한다. 효율은 도구의 언어이고, 이(利)는 사람의 언어다.
로봇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
이제 구절을 조금 더 뜯어보자. 備(비)는 갖춘다는 뜻이고, 物(물)은 사물, 致(치)는 이끈다·이르게 한다는 뜻이고, 用(용)은 쓴다는 뜻이다. 결국 이 네 글자는 사물을 갖추되 쓰임까지 책임진다는 태도를 말한다. 그릇을 만드는 일(立成器)도 여기에 붙는다. 그릇은 예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쓰일 때 비로소 그릇이 된다.
이 관점에서 AI물류자동화과를 다시 보면, 이 학과의 과제는 분명하다. 학생에게 로봇을 잘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로봇이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자동화는 야간 노동자의 몸을 지켜줄 수도 있고, 어떤 자동화는 한 지역의 일자리를 통째로 삼킬 수도 있다. 똑같은 컨베이어 벨트가 어디서는 구원이고 어디서는 상실이다. 기술은 중립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본다.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그 기술을 배치하는 사람은 중립적이지 않다.
일상의 예로 옮겨보자. 편의점에 무인 계산대가 들어왔다고 하자. 오후 2시의 나에게는 편리이고, 새벽 4시의 그 가게 사장님에게는 인건비 절감일 수 있고, 그 자리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에게는 하루아침의 실직일 수 있다. 같은 기계가 세 사람에게 세 얼굴로 다가온다. AI물류자동화과를 나온 사람은 이 세 얼굴을 모두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장비를 잘 고치는 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지점에서 공자의 말이 하나 떠오른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는 말한다.
人能弘道, 非道弘人 — 「論語·衛靈公」
인능홍도, 비도홍인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 역시 최근 인용된 바 있으니, 오늘은 뒤집어 읽어보려 한다.) 도(道)가 사람을 넓혀주지 않는다는 이 말은, 기술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시 겹쳐 읽힌다. 좋은 로봇, 좋은 학과, 좋은 커리큘럼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사람이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그 기술을 어디로 넓힐지 결정해야 한다. 학과 이름에 'AI'가 앞에 붙든 '물류'가 앞에 붙든, 결국 이름을 살리는 것은 그 학과를 다니는 사람이다.
배우는 자의 조용한 책임
내가 이 뉴스를 반가운 마음으로 보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가르치는 학교가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로봇 팔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강의실에 들어오는 사람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가 그 학과의 진짜 성적표가 될 것 같다. 상자를 빠르게 옮기는 손은 훌륭하지만, 상자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손이 더 훌륭하다. 어쩌면 다음 세대의 물류 전문가는, 오늘의 어느 기사 제목처럼 '로봇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넘어 '로봇과 함께 무엇을 할지 묻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기술은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강의실을 열어준다. 문제는 그 강의실에 들어갈 때, 우리가 무엇을 챙겨 드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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