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가 카드 결제까지 할 때, 장자는 무엇을 물었을까

카드사가 챗GPT 창 안으로 들어온 날

오늘 아침 뉴스 제목들이 유난히 낯설게 다가왔다. 비씨카드가 카드사 최초로 챗GPT를 통한 퍼스널 쇼퍼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상품 검색부터 페이북 쇼핑적립 혜택 확인, 구매까지 한 번에 연결된다고 한다. 같은 날 로그프레소는 '챗GPT 엔터프라이즈' 연동 앱을 내놓았고, 한국 금융권 해킹에 등장한 'ARTEX'라는 도구는 외부 거대언어모델(LLM)을 연결해 여러 AI 에이전트가 역할을 나눠 취약점을 탐색하고 침투한다고 보도됐다.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한 뒤 AI 열풍이 세계를 휩쓸었다는 회고 담론도 함께 흘러나왔다.

흥미로운 건 이 소식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챗GPT는 이제 묻고 답하는 창을 넘어, 지갑을 열고, 기업의 보안 로그를 읽고, 나아가 침입 경로를 스스로 설계하는 자리에까지 들어섰다. 편리함과 위험이 한 몸통에서 자라난다. 필자 생각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장면인 것 같다.

도구가 아니라 '거처'가 되어가는 것에 대하여

동양고전을 읽다 보면,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만났을 때 늘 두 가지 태도를 오갔다는 걸 발견한다. 하나는 그것으로 세상을 넓히려는 마음, 다른 하나는 그것에 자신을 맡기려는 마음이다. 앞의 것은 주체의 확장이고, 뒤의 것은 주체의 양도다.

비씨카드의 서비스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제 '고민하다가 검색하고, 혜택을 비교하고, 결제한다'는 일련의 사유 과정을 통째로 위탁할 수 있게 되었다. 얼핏 편리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사고 싶은지 스스로 더듬던 시간, 값과 효용을 저울질하던 망설임, 결국 사지 않기로 결정하던 절제가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욕망이 충족되는 게 아니라, 욕망을 다루는 근육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莊子는 「天地」편에서 말했다.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 「莊子·天地」

유기계자필유기사, 유기사자필유기심

"기계를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기계에 얽힌 일이 생기고, 기계에 얽힌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 같은 마음이 생긴다."

옛말이 지금의 챗GPT를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2천 년을 건너와 오늘 아침 뉴스 앞에 서는 걸 보면, 장자가 물었던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음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은 어디에서 자라는가

莊子가 말한 '기계심(機心)'은 나쁜 마음이 아니다. 계산하고, 효율을 따지고, 요령을 부리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밥도 못 먹고 회사도 못 다닌다. 문제는 이 마음이 삶의 전부가 될 때다.

여기서 유가의 눈을 빌려 보자. 공자는 「논어·술이」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 「論語·述而」

인원호재? 아욕인, 사인지의

"인(仁)이 어찌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인이 곧 이른다."

仁은 어렵게 말하면 '사람 사이의 따뜻한 책임', 쉽게 말하면 '남을 사람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공자는 이 마음이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결심 한 번이면 곧바로 내게 닿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仁이 앞의 機心과 정확히 반대편에 있다는 점이다.

機心은 '어떻게 하면 이득인가'를 묻는다. 仁은 '이 일이 사람에게 어떤가'를 묻는다. 오늘 뉴스에 나란히 등장한 두 장면이 바로 이 두 마음의 대비를 보여준다. 비씨카드의 서비스는 機心의 정점에 서 있다. 계산을 우리 대신 완벽하게 해주는 도구다. 반면 ARTEX를 이용해 금융권을 뚫으려 한 사람들 역시 機心의 정점에 있다. 저들은 남의 시스템을 '사람'이 아니라 '뚫리는 면'으로 본다. 도구는 다르지만 마음의 뿌리는 같은 자리에서 자란다.

그래서 필자는 챗GPT 자체를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 도구를 쥐고 機心의 방향으로만 달려간다면, 어느새 우리 자신도 '뚫리는 면'으로, '계산되는 값'으로 취급받는 세계가 온다. ARTEX 같은 도구가 등장한 이유는 이미 그런 세계의 문턱에 우리가 서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흥미롭게도 법구경에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은 구절이 있다.

법구경이 남긴 한 줄

心爲法本, 心尊心使 — 「法句經」

심위법본, 심존심사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며, 마음이 존귀하고 마음이 이끈다."

이 구절은 법구경 「쌍요품(雙要品)」의 첫머리에 나온다.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 마음이라는, 부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무엇이 '사용'이고 무엇이 '사용됨'인가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마음이 근본이라고 해서 도구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면, 도구는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챗GPT는 우리를 위해 일하는 도구일 수도 있고, 우리를 계산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 정한다.

일상의 예를 들어 보자. 어떤 회사원이 챗GPT로 보고서 초안을 잡는다 치자. 여기서 갈림길이 생긴다. 한 사람은 초안을 받아 스스로 고치고 다듬는다. 이 사람에게 AI는 붓이다. 다른 사람은 초안을 그대로 붙여 넣고 이해하지 못한 채 넘긴다. 이 사람에게 AI는 저자를 대신하는 자리, 즉 주인이 된다. 같은 도구가 어떤 사람에게는 손발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목줄이 된다.

부처의 말씀대로 마음이 근본이라는 건, 결국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챗GPT가 스스로 사람을 지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배하기를 그만둘 때, 도구가 우리 자리를 대신 앉는 것이다. 인공지능 윤리 담론이 늘 말하는 '통제권'(사람이 도구를 통제하는 것)도 사실은 이 이야기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 통제는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필자 생각엔, 챗GPT를 잘 쓰는 방법은 프롬프트 기술이 아니라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도구로 무엇을 하려는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인가, 게으름을 감추기 위함인가, 아니면 내 일을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기 위함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어떤 최신 모델도 우리를 편하게 만들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챗GPT에게 물어야 할 것

오늘 뉴스에 등장한 세 장면을 다시 펼쳐 보자. 카드사는 챗GPT로 결제를 연결했다. 보안회사는 챗GPT로 로그를 분석한다. 어떤 이들은 챗GPT로 시스템을 뚫으려 한다. 같은 도구, 다른 방향. 무엇이 이 셋을 갈랐는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쥔 사람의 마음이었다.

장자는 기계를 경계하라 하지 않았다. 기계에 얽힌 마음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라고 했다. 공자는 仁이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 결심 한 번이면 내게 이른다고. 법구경은 그 결심의 자리가 마음이라고 못 박았다.

오늘 하루, 챗GPT 창을 열 때마다 한 번쯤 스스로 물어보자. 나는 지금 이 대화로 무엇을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계산으로 밀어 넣고 있는가. 이 한 줄짜리 질문이, 어쩌면 이 시대 인문학의 가장 실용적인 쓰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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